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움베르토 2세 (문단 편집) === 망명 이후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이집트 왕국|이집트]]로 망명한 것과 달리 움베르토 2세는 [[포르투갈 제2공화국|포르투갈]]로 망명을 떠났으며, 망명지에서 포르투갈의 구(舊) [[귀족]][* 당시 포르투갈을 철권통치 중이던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가 이탈리아 구(舊) 체제에 호의적이었지만, 망명 당시 포르투갈은 이미 [[포르투갈 왕국|왕정]]과 [[신분제]]가 폐지되고 공화국으로 개헌한 지 한참이었다.] 및 [[파시스트]]들과 교제하며 안락한 여생을 보냈다.[* 이때 [[루마니아 왕국|루마니아 국왕]] [[카롤 2세]]와, [[헝가리 왕국(1920~1946)|헝가리]] [[섭정]]이었던 [[호르티 미클로시]]도 움베르토 2세가 망명한 포르투갈의 [[이스토릴]]로 건너왔고, [[프란시스코 프랑코]]에 맞서던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아버지인 [[후안 3세|바르셀로나 백작 후안]]도 살라자르 정권의 도움을 받아 이스토릴에 머물고 있었다.] 망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인 [[벨기에의 마리조제|마리조제]]와는 별거에 들어갔고 곧 혼자서 [[스위스]] [[제네바]]로 이주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별거했음에도 두 사람은 정치적·종교적[* 두 사람 다 종교가 [[가톨릭]]이었다. 가톨릭에서는 원칙적으로 [[이혼]]을 금한다.] 이유로 이혼하지 않았다. 별거 사유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전부터 타인과의 염문설이 도는 등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두 사람 사이가 전쟁 패전과 왕정 폐지를 계기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멀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도 [[그리스 왕국|그리스 국왕]] [[콘스탄티노스 2세]]의 결혼식에 함께 참석한 것을 보면, 공적인 자리에서는 동행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콘스탄티노스 2세도 [[그리스 군사정권|얼마 안 가 똑같이 망명자 신세로 전락한다...]]-- -- 그래도 외국에서 객사한 움베르토 2세와 달리 콘스탄티노스 2세는 어찌저찌 [[그리스]]로 귀국해서 노년을 보냈다.--] [[1974년]]에 [[카네이션 혁명]]으로 [[포르투갈 제2공화국]]이 붕괴하자 마리 조제가 먼저 떠났던 [[제네바]]로 이주해[* 나중에 포르투갈로 망명 온 여동생 조반나([[불가리아 왕국|불가리아 국왕]] [[보리스 3세]]의 왕비)는 카네이션 혁명 후에도 포르투갈에 남았다.] 그곳에서 1983년에 사망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사망 때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공화국 정부는 그의 장례식에 일체 조문하지 않았다.[* 단, 이탈리아어 위키에 의하면 당시 [[리옹]] 주재 총영사였던 마우리치오 모레노(Maurizio Moreno, 1940~2016)가 이탈리아 정부 대표로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한다.] 사망 직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움베르토 2세의 귀국 금지를 철회해줄 것을 부탁하였기 때문에 교황과의 관계를 고려한 이탈리아 정부에서는 공화국 수립 이후에 내려졌던 구 왕족들의 입국 금지를 폐지하고 이탈리아 방문을 허용할 것을 논의하기도 했으나 본격적인 움직임이 있기 전에 움베르토 2세가 사망하면서 없던 일이 되었다. 몇몇 정치인들은 움베르토 2세의 유해를 국내로 운구하자고 제안했지만 좌파에서 크게 반발했고 다수 여론 또한 부정적이었기에 무산됐다. 결국 움베르토 2세의 유해는 사보이아 가문의 조상들이 매장되어 온 [[프랑스]] [[사부아]]의 오트콩브 수도원(Abbaye Royale d'Hautecombe/Abbazia Reale di Altacomba)[* 주로 [[사보이아 백국|백작]] 시절의 사보이아 가문 사람들이 매장되었던 수도원인데 [[사보이아 공국|사보이아 공작]] [[필리포 2세]] 이후로는 [[사르데냐 왕국|사르데냐 국왕]] [[카를로 펠리체]]만 매장되었다.]에 안장되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마리 조제 왕비가 죽은 다음 해인 2002년 11월에야 의회 표결을 통해 사보이아 왕가 남자 구성원의 이탈리아 입국을 허가했다. 물론 입국만 허가한 것이지 일반 국민으로 대우하고 있고, 사보이아 가문은 이탈리아에서 아무런 정치적 영향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 이건 외아들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디 사보이아|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전 왕태자]]의 비행 및 망언으로 인해 사보이아 본가에 대한 우호적 여론이 크게 약화되었고, 움베르토 2세의 사후에 분가인 아오스타 공작가와의 계승권 논쟁이 발생하면서 복벽파 내에서 사보이아 본가에 비해 비교적 평판이 좋은 아오스타 공작가를 지지하는 파벌이 늘어나 그나마 있는 왕당파 세력마저도 분열된 탓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